말을 알아듣는 거지?
완연한 봄이 왔단다.
밖에 안 나가봐서 모르지만 베란다에 핀 화분들을 보니 봄이 오긴
온 모양이다. 간만에 베란다 문을 활짝 열어 놓을 수 있었다. 따뜻
한 봄기운이 스멀스멀 기어 들어오는 게 보인다.
어라? 그런데 뭔가 스멀스멀 기어 나가는 것들도 있었다. 김치와
장군이었다. 녀석들의 베란다에 대한 호기심이 극에 달아 있었던
모양이다. 투명하게 보이는 창밖으로 신기한 게 많이 보이는데 겨
우내 닫혀 있었으니 나갈 수는 없고...
그런데 그게 지금 열렸다. 녀석들에게는 천우신조의 기회가 온 것
이다.
녀석들이 베란다에 나가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우선 녀석들의 입
과 입에는 꽃잎이나 나뭇가지 같은 것들이 물러져 있고 주둥이 털
에는 고추장이 덕지덕지... 발에는 베란다 물통을 타고 내려온 구정
물이 척척하게 적셔져 온다. 베란다에 있는 예쁜 꽃잎들은 녀석들
의 호기심에 뜯겨지고 햇빛을 보기 위해 열려진 고추장 항아리는
녀석들의 공략대상이다.
스물스물 기어나가는 놈들을 발견하는 순간 냅다 소리를 질렀다.
"김치! 장군! 어디 가? 꼼짝 마! 혼난닷!!"
놈들은 무슨 나쁜 짓을 하다 들킨 것처럼 허둥거리며 다시 거실로
들어온다. 깜짝 놀란 표정으로 신기한 베란다의 풍경을 포기한 채
돌아서는 놈들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이지 웃음이 터져 나온다. 김
치는 별안간 지른 호통소리에 베란다로 내딛으려던 앞발이 얼음 광
선총이라도 맞은 듯이 꽉 얼어붙어 꼼짝을 안 한다.
이 모습을 상상해보라. 얼마나 웃긴지... 직접 보고 있는 나를 정말
미치게 만든다.
'즐겁게 춤을 추다가 그대로 멈춰라!' 이런 노래가 저절로 생각난
다
으흐흐~ 신기한 놈들... 그래도 말귀를 알아듣는 걸 보면 신통방통
하고 웃기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고 정말 정말 귀엽다. 이런 일 말
고도 녀석들이 말을 알아듣는다는 증거들이 있다.
"장군아~ 목욕하자."
한참 자고 있다가고 요 말만 들으면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잽싸게
소파 밑으로 숨어버린다. 훗! 내가 숨으면 못 찾을 줄 알구? 그러나
나는 못 찾는 척 하면서 다시 소리친가.
"장군아. 장군아, 어딨어? 어라? 장군이 어디 갔지?"
장군이 녀석, 아직은 안 들킨 줄 알고 몸을 최대한 움츠리고 숨도
죽인다. 귀엽고 가증스런 녀석. (^-^)
녀석들이 진짜 말을 알아듣는 것 같다. 옛날 내가 살던 옆집에서 아
침만 되면 뭐라뭐라 누군가를 꾸짖는 소리가 들렸던 기억이 난다.
옆집 아줌마: 내가 이런 짓 하지 말랬지. 몇 번이나 말해야 알아듣겠어,
응? 너 나중에 뭐가 되려고 그래, 응? 또 할 거야, 안 할 거야? 맴매해!
나는 그 집 아들이 혼나는 줄 알았다. 물론 그것은 아니었고 그 집
강아지를 꾸짖는 소리였다. 너무 차근차근 하나하나 사례를 짚어가
면서 혼을 내길래 나는 사람 혼내는 줄 알았다. 이층 창문 밖으로
몸을 길게 빼고 그 집 마당을 들여다봤더니 글쎄, 그 집 강아지가
정말 무릎 끓고 혼나고 있었다. (-_-;) 정말 당시로서는 엽기적인 모
습이 아니라 할 수 없었던 현장이었건만 지금은 내가 김치에게 그
런 짓을 하고있으니...
애들은 신기한 구석이 참 많다. 언제 봐도 새로운 돌출 행동과 이해
못할 행동들이 이어진다. 말을 하면 알아듣고 칭찬하면 좋아하고
꾸짖으면 침울해 하다가도 금새 다시 달려들어 꼬리를 흔들고 그러
니, 예뻐 안 할래야 예뻐 안 할 수가 없다.
지금 김치는 우리 애인에게 꾸중을 듣고 있다. 또 목욕탕에 들어가
서 빨래 거품을 먹은 모양이다.
"어이구... 이게 뭐야! 누가 이런 거 먹으라고 했어? 응! 또 그럴 거
야?"
시끄럽지만 행복한 소리인 것 같다. (^-^)
............................................나의 강아지 김치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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