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반디는 우리 엄마에게까지 인정받은 친구가 되어 있었다. 어
른들이 꿈꾸는 '건전한 이성 교제'가 이상주의자들의 궤변이라고만 생각
해왔던 엄마는 반디를 통해 새로운 차원의 세상을 알게 되었다며 한동안
감격스러워하셨다. 반디는 늦은 밤까지 울 엄마가 만들어 주는 생과일주
스나 김치전 등을 먹으며 방에 같이 엎드려 숙제도 하고 비디오 게임도
했다. 게임에 몰입하다가 어쩔 때는 내 방에서 그대로 잠을 자고 아침에
가기도 했다. 엄마도 반디가 워낙에 나를 이성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믿었기 때문에 나와 똥코는 침대에서 자고, 반디를 위해서는 바닥에
이불까지 깔아 주셨다. 똥코는 내가 4년째 키우고 있는 강아지이다. 하얀
색 시츄로 날 닮아서 약간 성깔은 있지만 무지하게 귀엽다.

물론 우리도 지킬 것은 지킨다. 반디가 놀러와 있을 때 우린 항상 방문
을 열어 놓고 있었다. 촌스럽지만 그래도 그렇게 하는 거라고 가르쳐 준
건 바로 반디였다. TV에서 봤다나? TV를 믿는 사람들은 대체로 단순하
다. 난 반디의 그런 단순함을 좋아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 반디를 우리 동네에서 제일 예쁜, 길 건너 여자 고등학교에
다니는 어떤 아이와 소개팅까지 시켜 주었다. 둘이 몇 번 만나는 거 같더
니만, 한동안 잠잠하길래 물어봤다. 그때 우리는 거실에서 미술 숙제를
하고 있었는데 모자이크를 만드는 거였다. 잡지를 뒤적이다가 맘에 드는
색깔이 있는 페이지는 뜯어서 가위로 잘게 잘랐다. 난 똥코를 모자이크
로 만들고 있었고, 반디는 아직 뭘 만들지 결정을 못하고 고민하는 중이
었다. 처음엔 이상한 잡지에서 뜯은 여자 누드사진을 가지고 와서는 '거
기'만 '모자이크 처리'해서 숙제를 내겠다고 해 나한테 된통 얻어맞기도
했다. 어쨌든 여자의 누드사진은 결국 똥코의 발바닥에 살색이 필요해서
그때 사용했다. 숙제를 마치고도 살색 종이는 많이 남았다.

나 : 왜... 요새 걔 안 만나? 너 채였지?

반디 : 그런 거 아냐....

나 : 그럼 네가 찼어? 주제에?

반디 : 안 만날래....

나 : (소리치며) 왜?!!

반디 : ... 네 욕하잖아. 그래서 싫어졌어.

난 순간 목에서 뭔가 울컥했다. 그런 걸... '감동'이라고 하는 거다. 이
럴 때 나는 사람의 마음은 가슴이나 머리에 있는 게 아니라 목에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감동을 느끼거나 사랑을 느끼거나 슬픔을 느낄 때, 사
람은 목부터 울컥한다. 현대 과학도 아직 인간의 마음이 인간의 신체 어
디에 있는지 정확히 증명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음은 머리나 가슴에 있다고 믿는다. 그게 틀릴 수도 있다. 고대 이집트
인들은 그토록 높은 수준의 문명을 누리고 있었으면서도 사람의 뇌에는
콧물이 들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미이라를 만들 때는 뇌를 파냈다
고 한다. 난 현대 과학도 그렇게까지 신뢰하지 않는다. 아직까지 감기의
원인도 밝히지 못했다는 그 수준에서 어떻게 인간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
지를 알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의 마음은 목에 있을 것이다.

어쨌든, 그년이 나에 대해 뭐라고 욕했는지 그런 건 상관없다. 사람이
살다보면 욕하고 그럴 수도 있다. 그런데 단지 그 이유 때문에 반디는 그
렇게 예쁜 애를 찼다. 이렇게 통쾌할 수가 없다. 이건 우정이 도달할 수
있는 최상의 경지에 반디와 내가 올라와 있음을 의미하는 거다. 난 한손
엔 가위를 들고 그런 사랑스런 반디를 바라보며 희죽 웃어 주었다.

반디: 왜 그러냐? 징그럽게....

나도 우리 엄마도, 반디의 그 우정이 영원하리라 믿었다.

........................................................the 클럽 中

Posted by Due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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