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저녁 우타노 유스 호스텔로 왔을 때였다. 서양인, 일본인들과 뒤섞여 여러 명이
함께 자는 방에 중학교 1학년 일본 학생이 있었다. 도코에서 교토로 혼자 여행을
왔다는 소년은 건너편 침대에 앉아 계속 내 눈치를 보았다. 잠시 후 큰마음을 먹은
듯 심호흡을 하고 내 앞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하는데,
일본어를 잘 모르는 내가 알아들은 단어는, '과거'라는 단어와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을 미워합니까?"라는 말이었다.
아마도 소년은 일본 정치인의 망언에 항의하는 한국인들의 시위 광경을 TV를 통해
많이 본 것 같았다. 수줍음으로 벌겋게 상기된 소년의 표정은 진실로 그것을 알고
싶다는 듯 간절해 보였다.
당황스러웠다. 금방 조선인의 코가 묻힌 무덤을 보고 온 나로서는 그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다 해주고 싶었다. 임진왜란, 한일합방, 창씨개명, 고문, 학살, 그리고 현재
일본의 우졍화와 재무장에 대한 우려, 또 일본인이 한국에 대해 갖고 있는 편견에
대해서도.
하지만 일본어를 못하는 나로서는 방법이 없었고, 또 일본어를 잘한다 해도 머리를
빡빡 깎은 그 어린 소년 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잠시 생각을 하다가 나는 서툰 일본어로 이렇게 말했다.
"무가시와 무가시, 이마와 이마데스 과거는 과거고 현재는 현재입니다.
와다시와 신세스나 니혼진가 스기데스 나는 친절한 일본인을 좋아합니다."
그러자 소년은 감동한 듯이 고개를 깊숙히 숙이며 이렇게 외쳤다.
"하이, 혼도니 아리가또 고자이마쓰. 정말로 고맙습니다."
소년은 너무나 감격해서 눈물이라도 떨어뜨릴 것처럼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그날 밤 잠자리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열네 살의 어린 소년이었다. 도쿄에서
교토까지 배낭을 메고 혼자 여행한다던 씩씩한 소년이었다. 나 역시 배낭을 메고
낯선 길을 헤쳐 가던 여행자로서 그 소년에게 정치와 역사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혼자서 여행하고, 낯선 이에게 다가와 솔직하게 묻고 또 감격하는 모습이
대견스럽기만 했다.
1990년도의 일이었으니까 벌써 소년도 지금쯤 서른이 되었을 것이다. 2002년
월드컵 때, 많은 일본 젊은이들이 도쿄 신주쿠의 어느 광장에서 교포들과 함께
대~한민국을 외치며 응원하던 모습을 보며 나는 불현듯 그 소년을 떠올렸다.
혹시 그도 거기에서 같이 대한민국을 외치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리고 어디선가 용감하게 배낭을 메고 여행하는 한국 소년을
만나면, 힘과 용기를 주기를 바랄 뿐이다. 어른들은 그 어떤 이유로도 아이들을
미워할 권리가 없다. 그들은 천사이기 때문이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황홀한 자유中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형도 - 빈 집 (2) | 2007.06.12 |
---|---|
걷기 여행 中... (4) | 2007.06.08 |
프리덤 라이터스 다이어리 The Freedom Writers Diary (1) | 2007.05.28 |
오규원 - 한 잎의 여자 2 (0) | 2007.04.26 |
나는 길고양이에 탐닉한다 (0) | 2007.04.04 |